와선재
이로재김효만건축사사무소 | IROJE KHM Architects
부식된 담장 사이로 한옥 풍경이 정겹게 마중을 나온다.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는 듯 그리움이 묻어나고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건네는 것 같다. 대문을 들어선 아담한 마당에서도, 마당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거실에서도, 주방의 네모난 창문을 통해서도, 2층 방과 복도를 거닐 때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한옥이 있다. 때로는 처마선이 아른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하얗게 회칠한 벽면이 정갈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2층에서는 일렁이는 기와지붕이 내려다보이며, 마당에 들어설 때면 격자무늬 문이 여전히 기품 있는 모습으로 반긴다. 심지어는 한옥을 등지고 섰을 때조차도 한옥을 마주한다. 커다란 거실 창에 반추되는 모습이 실물과는 또 다른 아련한 정취를 풍긴다.
한옥은 건축주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 자라난 곳이다. 근처에는 조상들의 선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한옥은 그저 집이 아니다. 건축가에게는 생명의 근원이자 삶의 흔적이 축적되고 응축되어 있는 특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건축주가 출가하여 한 세대의 가족을 구성하고 사는 동안 어머니가 줄곧 그 ‘장소’를 지켜 왔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삼대가 모여 함께 살아갈 터전을 다시 일군 것이다.
우렁이는 껍질 속 자신의 살 속에 새끼를 낳는다. 새끼들은 그 살을 먹고 자라나 어미 우렁이는 껍질로만 남게 된다. 생명의 전수가 이루어지는 자연의 이치 중 하나인 ‘와蝸의 선善’이다. 속살을 다 내어주고 남은 어미 우렁이의 껍질처럼 남은 한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멸해 간 그간의 시간과 장소를 복원해 내고 지켜 내리라는 의지를 집은 형태를 통해 친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집은 대지의 경계를 따라 둘러싸고 있는 벽처럼 서 있다. 그 한가운데에 한옥이 자리한다. 또 하나의 껍질로서의 의미를 가진 켜로서 집이 존재하는 것이다. 외벽에 사용된 내후성강판의 부식된 모습은 오래도록 시간이 누적된 원초적 껍질을 연상시킨다. 내부에 사용된 미장의 벽과 노출콘크리트 벽 등에서는 보드라운 속살 같은 흘러간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된다. 또, 언젠가는 밖으로 밀려나갈 잠재적 껍질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성을 상징하는 이 벽들이 땅을 분할하며 여러 개의 마당을 만들어내고 있다. 중첩되고 흩어진 마당들을 매개로 구옥과 신축이 어우러져 있다. 아니, 현재의 껍질이 과거의 껍질을 정말 소중하게 품고 있다. 과거가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이어져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집은 ‘와의 선’이 가진 슬픈 숙명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현 시대의 새로운 켜를 통해 어미 우렁이가 복원되고 지켜지는 ‘해피엔딩’이다.
작품명: 와선재 / 설계: 이로재김효만건축사사무소 / 위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327-4 / 지역.지구: 자연녹지지역, 자연취락지구 / 주요용도: 단독주택 / 대지면적: 515m² / 건축면적: 200.66m² / 연면적: 275m² / 건폐율: 38.96% / 용적율: 53.4% / 규모: 지상2층 /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 외부마감:내후성강판, 드라이비트 / 내부마감:노출콘크리트, 온돌용목재후로링, 미송합판-색락카, 석고보드-색락카 / 설계담당: 정수미, 박미영 / 구조설계: 전광민 / 조명: LITE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