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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기하학적 형태의 볼륨에 담긴 현대성, 중세 유럽을 연상케 하는 두꺼운 벽돌벽에 녹아있는 전통성.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살린 모더니즘을 구현하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해 온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한국을 찾았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극장에서 마리오 보타의 건축 세계를 소개하는 영화 상영회 및 공개 강연회가 한국건축가협회의 주최로 개최됐다. 해외 유수의 건축가를 초빙해 보다 많은 이들에게 건축의 진정한 의미를 알리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행사로, 현장은 세계적인 거장 건축가를 직접 만나보기 위한 수 백여 명의 건축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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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페이스 비욘드The Space Beyond. 신성한 공간의 의미를 찾아서

로레타 달포쪼Loretta Dalpozzo와 미셸 볼론테Michèle Volontè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더 스페이스 비욘드The Space Beyond‘는 마리오 보타의 종교 건축물들을 통해 ‘신성한 공간’의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는 다큐멘터리다.

영화에서는 연내 완공을 앞둔 ‘남양 성모성지 대성당’을 비롯하여 중국, 이스라엘, 이탈리아, 스위스 등 다섯 개 국가에서 작업한 다섯 개의 건물이 소개된다. 국가도 종교도 다르지만, 모두 신을 만나는 ‘신성한 공간’들이다.
보타는 점점 더 세속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신성한 공간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사회일수록 신성한 공간은 그 진가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신성한 공간은 땅의 기억, 그리고 그 땅에 살아가는 이들의 기억 위에 지어지므로 건축의 본질과 맞닿아 있고, 그렇기에 이 공간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처한 모순적 상황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기준점이 된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영화 초반에는 마리오 보타가 홀로 등장해 자신의 건축에 대해 얘기하지만, 뒤로 갈수록 다양한 인물들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을 짓고 싶어하는 사람, 건물을 짓는 사람, 지어진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 지어질 건물을 이용할 사람까지, 등장 인물의 범주도 넓다. 건물에 관련된 다양한 이들의 입을 통해, 마리오 보타의 건축과 그의 작업 방식을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로레타 달포쪼 감독은 “영화 촬영 동안 마리오 보타의 곁에서 작업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건축에 대한 큰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이 느낌을 향유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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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페이스 비욘드’ 스틸컷 (©Swissbridge Produ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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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영역, 건축은 기억을 담는 것

상영회 후에는 ‘기억의 영역Territory Of Memory’을 주제로 공개 강연회가 이어졌다. 마리오 보타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가 손진의 사회 및 통역으로 진행됐다.
강연회에서는 교보타워, 리움 미술관을 비롯하여 중국, 스위스 등 전세계에 지어진 대표작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건축 토대가 되어온 이념에 대해 설명했다.

핵심은 강연의 제목이기도 한 ‘기억’. 그는 강연 내내 ‘건축은 그 자체가 기억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축은 분명히 현재에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건축은 과거를 담는 도구로 사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방법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과거의 기억을 담은 이러한 건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향수를 충족시키는 안정감을 선사한다며, 과거에 뿌리를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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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마리오 보타 사인회 오른쪽 로레타 달포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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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빛에 대한 그의 생각도 들어볼 수 있었다. 빛의 대가들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와 루이스 칸, 그리고 그들의 사무실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마리오 보타. 세 거장이 추구하는 빛은 어떤 차이가 있냐는 질문에, ‘르코르뷔지에의 빛은 모더니즘이라는 흐름을 이끄는 상징이며, 루이스 칸의 빛은 문제의 근원을 풀어내는 방식이다. 반면, 나는 이미 존재하는 빛을 활용하는 것뿐’이라며, 겸손한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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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서 출발해, 다시 기억을 담아내는 건축. 그리하여 지나간 세월을, 깊숙이 묻어뒀던 감정을 끌어내고 치유하는 건축. 이러한 마리오 보타의 건축이 ‘남양 성모성지 대성당’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순교자들의 아픈 기억, 피로 얼룩진 땅의 기억을 담아낼지 기대해 본다. 글 / 전효진 기자, 김소정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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