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마치레빗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앨리스는 분주해 보이는 새하얀 토끼를 따라가야만 할 것 같다. “Follow the white rabbit.”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암호로 더욱 유명세를 탄 ‘마치 래빗’, 녀석은 앨리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모험의 세계로 안내한다. 익숙한 일상에서 낯선 환경으로 전환시켜 주는 움직이는 통로인 것이다.
서울의 번화한 청담동 뒷골목에 자리하는 근린생활시설이 <이상한 나라의 앨래스>에 등장하는 마치 래빗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상점들이 번화한 가로와 조용한 주택가의 경계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규모로 들어선 모습이 이름 그대로다. 순백색의 볼륨으로 3월의 토끼가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벽돌, 대리석, 목재 등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재료들을 과감히 지양했다. 여러 재료와 색으로 뒤덮는 치장을 제거하고 순백색의 단순함만 남겼다. 재료의 물성을 소거하는 것만으로 낯선 풍경을 연출해낼 수 있었다. 그 모습 자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자연스럽게 행인들을 유인한다.
깊숙한 토끼 굴 너머의 낯선 세계가 갖는 심층적 요소, 몸이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하는 높낮이의 변화, 느닷없이 나타나는 찬란하고 눈부신 정원 등 소설 속 주인공의 경험과 배경이 변화무쌍하고 특별하다. 평면 구성의 개념을 여기에서 찾았다. 새로운 사용자에 의해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공간임을 고려한 것이다. 이를 위해 엘리베이터, 계단, 화장실 등 공용공간을 최소화하고, 임대 면적을 최대화하여 어떤 프로그램에든지 유연하도록 했다.
건물의 외내부에서 가변성과 유연성은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건물은 조각난 공간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간의 물리적 경계를 명확히 세우다가도 필요에 따라 수월하게 허물 수 있다. 내부에서도 두 개 층 이상을 한꺼번에 사용할 경우 건물 후면에 마련된 여유 공간을 코어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계획했다. 층의 경계를 넘나들도록 건물에 탄력성을 부여한 것이다. 각 층을 따라 이동할 때마다 예상치 못한 다른 전망이 펼쳐지고, 빽빽한 건물 틈 사이에서 각 공간만의 조각난 하늘을 품는다. 창 너머 건너편 아파트의 조경이 내 정원인 양 들어오는 것도 신선하다.
소설 속, 마치 래빗은 낯설지만, 고유의 특별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 고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연한 이벤트를 끄집어내는 장치가 될 때, 건축은 일상을 담는 그릇이 아닌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증식시키게 된다. 청담 마치 래빗의 가치가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프로젝트명: 청담 마치 래빗 /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산대로 90길 17-6 (청담동 62-4) / 설계: 김동진(홍익대학교)+㈜ 로 디자인+도시환경건축연구소 / 설계팀: 이상학, 주익현, 윤지혜, 권정열, 김민지 / 시공: ㈜ 제효 / 용도 : 제2종 근린생활시설 / 대지면적: 318.10㎡ / 건축면적: 154.81㎡ / 연면적: 989.87㎡ / 건폐율: 48.66% / 용적률: 231.18% / 규모: 지하 1층, 지상6층 / 건물높이: 21.96m / 구조: 철근콘크리트 / 외부 마감: 모노쿠쉬, 징크패널 / 설계기간 : 2013.6~11 / 시공기간 : 2013.11~2014.11 / 사진 : 김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