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로그’로 만나는 김중업의 삶과 건축
어떤 건축가가 30여 년 간 이 땅에 수많은 흔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30년. 그의 건축은 여전히 위풍당당 하기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색을 잃기도, 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서강대학교 본관 등 초기작품과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 제주대학교 본관(1965, 철거), 삼일빌딩, 그리고 유작인 88올림픽 기념 세계평화의문에 이르기까지 30년에 걸쳐 흔적을 남기고 떠난 이는 바로 한국의 근현대건축을 촉발시킨 1세대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이다.
올해로 김중업의 사후 30주기를 맞아 그의 건축과 더불어 생애 전반을 조명하고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특별전을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김중업건축박물관의 소장품과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된 사진과 영상 등 3,000여점의 자료를 선보인다.
반세기가 채 되지 않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살다 간 인물임에도 그에 대한, 그리고 그가 남긴 것들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박약하기 그지 없었다.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팀은 김중업과 실제 대면했던 사람들, 그를 연구한 학자들과의 무수한 대화를 채집하면서, 여기저기 흩어진 김중업의 파편들을 그러모으고, 그물망처럼 얽힌 흔적의 타래를 풀며 추적해 나갔다. 김중업을 둘러싼 수많은 ‘다이얼로그’가 전시의 실마리가 되어준 셈이다. 퍼즐을 맞추듯 김중업의 실체를 찾아 당대의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했다.
김중업 톺아보기
전시는 <김중업 매트릭스>로 시작한다. 김중업 작품의 연대를 후기에서 전기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김중업 건축의 초기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병치시켰다. 가느다란 기둥에 매달린 사진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며 미로를 만든다. 전면 거울을 통해 무한루프처럼 확장된 ‘매트릭스’를 통과하면 첫 번째 섹션 <세계성과 지역성>으로 들어서게 된다. 1950년대, 전쟁으로 초토화된 우리 땅에서 건축의 이미지를 발굴하고, 건축의 위상을 문화, 예술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려 했었던 ‘이미지메이커’로서의 김중업을 그린다.
평양에서 태어난 김중업은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에서 에꼴데보자르 식 건축 교육을 받았다. 르 꼬르뷔제의 건축을 동경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 참석을 계기로 파리로 건너가 르 꼬르뷔제의 아틀리에에서 3년간 일했다. 귀국하여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모더니즘과 한국의 전통성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건축 언어가 잘 구현됐다고 평가받는 ‘부산대학교 본관(1956)’과 ‘서강대학교 본관(1958)’, 이번 전시의 포스터 이미지로 소개된 ‘건국대학교 본관(1956)’, 지역성(로컬리티)과 세계성(글로벌리즘)의 긴장관계 속에서 태어난 명작 ‘주한 프랑스 대사관(1960)’ 등이 소개된다. 르 꼬르뷔제의 근대 5원칙에서 추출한 듯한 김중업의 조형적 어휘와 더불어 한국 전통건축을 탐구했던 초기 김중업 건축의 특성을 보여준다.
김중업은 예술가로서의 건축가 상을 평생 추구했다. 한국전쟁 이후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서 건축을 자율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한 시대적 요청과도 관련이 있다. 이어지는 <예술적 사유와 실천> 섹션에서는 예술과 건축의 교류를 적극 시도한 김중업의 흔적을 살핀다. 파리에서 귀국한 후 1957년 4월, 건축가로서는 최초의 개인전이었던 ‘김중업건축작품전람회’를 열었으며,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건축가의 작가적 입지를 알리는데 힘썼다.
한국 전쟁으로 부산에 머물던 시절, 예술가들의 아지트이자 인력사무실의 역할까지도 했던 광복동 거리 다방에서 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작가들의 전시와 작품활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이 김중업으로 하여금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타피스트리 등을 건축에 접목하며 건축을 매개로 한 총체예술을 구축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 ‘프랑스대사관’에서는 윤명로, 김종학 작가의 세라믹 모자이크 벽화를, ‘올림픽평화의문’에서는 판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백금남의 단청과 미술작가 이승택이 제작한 마당의 조각 열주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이 섹션에서는 프랑스 영화감독과 함께 ‘프랑스대사관’과 ‘삼일빌딩’, ‘도큐호텔(현 단암빌딩)’ 등을 배경으로 만든 20분짜리 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상영한다. 이 영화는 1971년 10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김중업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도 상영되었다. 영화와 건축을 결합해 보려했던 김중업의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이어지는 <도시와 욕망> 섹션에서는 김중업 건축을 도시의 문맥을 통해 살펴본다. 김중업의 건축은 조형적 측면, 전통과 현대의 유산으로 주로 해석되면서 많은 변화를 보여준 후기 작업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이 섹션은 김중업 건축의 전체 지평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의도에서 기획됐다.
김중업은 ‘삼일빌딩’, ‘도큐호텔’, ‘중소기업은행 본점 빌딩(계획안)’,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 등 당대 기술과 자본을 응집시킨 많은 빌딩을 지었으며, 1980년대 전국으로 확산된 지방 도시의 문화시설을 맡아 설계했다. 또한 변화하는 사회 구조에 따라 산부인과, 쇼핑센터 등 전에 없던 새로운 시설들과 독특한 개인주택들을 구상하며 급변하는 도시 속에 쉽게 변하지 않을 이상적인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흑백 사진이 눈길을 끈다. 1960년대 말 서울을 담은 파노라마 사진으로, 왼쪽에 ‘도큐호텔’과 오른쪽에 ‘삼일빌딩’이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다.
삼일빌딩은 기본설계부터 완공까지 한국 건축가 김중업이 지은 최초의 초고층 건물이다. 하지만 김중업이 1971년 광주대단지 필화사건(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이에 대한 비판의 글을 발표하여 정권의 제재를 받음)으로 인해 파리로 추방을 당하면서 완공을 함께하지 못했다. 전시장에 걸린 삼일빌딩 스케치에는 파리에 있던 김중업이 한국 사무소 직원들에게 삼일빌딩 공사에 대해 조목조목 지시한 손글씨가 남아 있다. 삼일빌딩은 1980년대 서울에 많은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당초 140m의 높이로 계획되었으나 풍압으로 인해 115m로 변경되면서 층간 두께가 매우 얇게 처리되어 더욱 날렵하고 아름다운 비례가 도출되었다. 삼일빌딩은 김중업의 오피스 빌딩 중에서 가장 수작으로 꼽히는 동시에, 빠른 속도로 개발되는 서울의 위상을 상징하여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삼일빌딩이 흑수정이라면 도큐호텔은 진주에 비유할 수 있는데, 정다영 학예사의 설명에 따르면 김중업은 아름다운 도시 서울에 자신이 설계한 건물이 보석같은 존재로 빛나길 바랐다고 한다. ‘KBS방송국’이나 ‘갱생보호회관’, 작지만 동네의 이정표가 되어준 ‘태양의집(현 썬플라자)’, ‘서병준산부인과(현 아리움사옥)’. 짧게는 30년에서 50년 이상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익숙한 배경이 되어준 이러한 건물들을 보고 있자면, 그의 바람은 이미 지켜진 듯하다.
한국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과 함께 1978년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김중업의 건축은 전과 다르게 미래주의적 면모를 띄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 계획안들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고, 88 올림픽을 기념하는 ‘세계평화의 문’이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기억과 재생> 섹션에서는 넓은 의미의 건축적 기억과 그것의 재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오늘날 도시재생과 근대건축의 보존 문제가 화두다. 김중업의 건축물도 여지없이 사라지거나 변화를 앞두고 있다. 부산충혼탑, 유엔묘지정문 등 태생적으로 신화를 기억하기 위한 건물들이거나, 이미 허물어져버린 ‘제주대학교 본관’, 한때 폐관 위기에 놓였다가 올 4월 서울시가 장기임대하여 재개관한 ‘세실극장(구 대한상공회관)’, 리노베이션을 통해 김중업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난 ‘유유제약 안양공장’ 등이 그 예다. 주한프랑스대사관도 변화를 앞두고 있다.
프랑스 설계사무소 사티와 한국의 매스스터디스가 설계를 맡아 11층짜리 사무동과 2층 짜리 갤러리동을 새로 짓고 김중업이 설계한 관저와 사무동은 복원할 예정이다. 처음 지어질 당시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섬처럼 고고히 존재했던 대사관이 이제는 상반된 맥락에 처했다. 고층 건물들로 둘러쌓여 고립된 섬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영향을 받아 성역으로서 구상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왜소해진 건축물이 현재와 교차하며 어떻게 재해석, 재구성될지, 초기의 날렵한 전통미를 잃어버린 관저의 지붕이 어떻게 복원될지 주목된다.
마지막으로, 전시장 바깥 홀에는 <김중업 살롱>이 마련되었다. 서강대학교 입면의 차양막을 오마주하여 만든 책꽂이와 가운데 테이블 위에는 각종 출판물이 놓이고, 양 벽면에는 김중업이 프랑스로 추방당하기 전, 후로 나뉘어 연대기가 펼쳐진다.
서두에도 설명했듯, 김중업은 누구보다 이미지의 힘을 알고 전략적으로 활용했던 건축가다. 또한, 건축에 예술을 끌어와 하나의 매커니즘 안에서 연동시키려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의 건축에서 중요했던 또 다른 요소는 ‘사람’이다. 김중업의 포트폴리오를 세심히 살펴보면 건축물 전체를 오브제로서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기 보다 부분적으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사람의 움직임을 개입시켜 사용자들이 공간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 건물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혀지는지를 보여준다. 전시 초입 <김중업 매트릭스>에서 과거와 현재의 사진들을 병치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중업 자신이 선택한 이미지들이 건축과 함께 어떻게 읽혀지길 바랬는지, 자신의 건축을 대중에 어떻게 이해시키려 했는지 비교하며 살펴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다음은 정다영 학예사가 전한 전시 관람 포인트다. 김중업의 건축은 한마디로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기둥, 창, 벽, 지붕 등 건축의 특정 요소들이 그의 건축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A의 지붕이 B에, C의 창문이 D에도 등장하는 식이다. 숨은 그림을 찾듯 김중업의 건축물을 뜯어보는 재미도 이번 전시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중업, 한국 건축가 연구의 출발점이 되다
2013년 정기용, 2014년 이타미 준, 김종성, 2017년 윤승중 전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이 연 다섯 번째 건축가 전시다. 최근 작고한 정기용, 이타미 준, 그리고 원로건축가로서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종성, 윤승중에 비해 이번 김중업 전은 수십년이나 된 흔적을 찾는 모든 과정이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전시팀은 전한다. 대부분의 자료는 김중업문화재단에서 보관하고 있어 전시에 필요한 모형과 도면, 사진 자료들은 협조를 받았으나, 사료 조사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김중업의 작가론을 연구한 이 또한 정인하 교수한양대학교가 유일하다. 김형미 학예사의 설명에 의하면, 김중업의 건축은 전기와 후기의 특징이 많이 다르고, 비평할 근거가 매우 다양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다.
지난 8월 2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다영 학예사는 이번 김중업 전시가 ‘막 촉발되기 시작한 한국 건축가 연구의 출발점’으로, 김중업 이후 한국 건축가의 계보학적 맥락을 살피는데 유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중업 이후의 건축가 전시 계획에 대한 질문에 아직 결정된 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명확한 계획이 없거나 계획이 있어도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건축 전문 공간을 신설하면서 건축을 대중에 많이 알려 나가는 것은 물론, 보다 깊이 있고 체계적인 건축 자료에 대한 연구와 보존 또한 이루어 질 것이란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박위진 기획운영단장은 그간 중장기 계획 없이 전시를 준비하며 국제교류나 출판 등 전시 이외의 관련 제반 사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중업 전시 또한 표류하는 시스템 하에서 준비가 충분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시 내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저작권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 더 방대한 결과를 담아내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가 발목을 잡혔던 배경에는 지난 10년간 지지부진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 검토 문제가 있다. 미술관 발전 방향이 그간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것이다. 지난 6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법인화 검토를 중단키로 결정하며 국립현대미술관에 미술관 조직 개선 방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곧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관 조직 개선 방향이 담긴 ‘중기운영혁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안에는 출판, 전시, 소장 등 미술관의 주요 기능을 강화하고 3~5년 앞선 전시기획을 추진, ‘연구→ 수집→ 전시→ 출판’의 선순환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심도 있는 프로그램의 운영을 위해 전시 수를 줄이는 등의 미술관 쇄신 방안이 담겼다. 이는 내년도 개관 50주년을 위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이로써 국립현대미술관은 재정자립과 경쟁력 강화 보다는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더 우위에 놓게 됐다. 혁신과 장기 계획을 통해 국민에게 더 좋은 전시를 제공하고 국가차원에서 예술인과 예술품에 대한 연구와 보존을 지속해 나갈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맡아 발굴, 연구해야 할 건축의 소재들은 무궁무진하다. 그간 가리워온 많은 건축가와 건축 관련 사료들이 대중에 한껏 선보여지길 기대한다.
글 / 현유미 기자, 사진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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