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와 도시 사이
다이얼로그
미술관 문턱이 예전보다는 한참이나 낮아졌다 하더라도 전시장에 갈 때면 왠지 모르게 걸음걸이부터가 조심스러워진다. 그 정도의 조심스러움, 혹은 그 정도의 고상함과 우아함은, 비범한 예술가들의 세상을 방문하기 위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처럼 느껴지는 탓일까.
어쨌든 전시를 관람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길을 나선다. 목적지는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지하철에서 내려 역을 빠져나오려 부지런히 걷는데 지하보도 한편에 전시장이 나타났다. 전시된 작품들이 눈에 익다 했더니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던 그림들이다.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지상이다. 지상의 광장에서도 독도, 세월호 등 갖가지 주제의 전시들이 한창이다. 미술관에는 아직 도착하기도 전인데 이미 몇 개의 전시 관람을 마쳤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전시가 우리 주변에 스며 있었던 걸까?
‘다이얼로그’는 그 질문에 답해주는 책이다. 그렇다고 전시장의 시시콜콜한 실용을 담고 있거나 세세한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는 뜻은 아니다. ‘전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파고들어, 무겁지 않게 고리타분하지 않게 써 내려간 ‘전시 공간에 관한 에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가 생기는 순간. 전시는 그 규모와 관계없이 진한 질문을 던지는 힘이 있다.”
도시를 공부한 뒤 공공미술기획가로 활동하며, 줄곧 도시와 전시 사이의 삶을 설계해 온 저자는 ‘전시’가 가지는 ‘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리고 전시를 진정으로 ‘향유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전시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저자는 전시 공간과 그 경계에 집중한다. 그의 시선은 전시의 첫 형태가 등장한 14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매우 익숙한 ‘갤러리’라는 단어는 본래 중세 유럽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수집의 공간이었다. 당시 그들은 자본을 과시하기 위해 신기하고 희귀한 물품을 모아서 잘 보이는 곳에 전시했고, 이것들이 점차 밖으로 나와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오늘날의 전시라는 형태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세월이 흘러 전시는 일상 곳곳에 스며 들었다. ‘관’에 갇힌 전시는 이제 기존의 경계를 넘어 도시 안과 밖에 자리해 있다. 저자는 밀라노 공대 전시디자인 과정에서 시작하여, 베네치아, 토리노, 베를린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진 자신의 전시 여정을 되돌아보며, 지금까지 경험했던 다양한 전시 작업과 도시와 공간을 살리기 위해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도시 이곳저곳을 누비며 전시란 무엇이고 과거에는 어땠는지,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한다.
펼쳐진 것(展)을 보여 주는(示) 작업, 전시. 보여지는 것들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우리에게 의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시와 전시를 품은 도시 공간을 발견하고, 전시와 도시 공간이 던지는 메시지에도 귀 기울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