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최근 건축계에서 끊임없이 화두에 오르고 있는 소재이다. 낙후되어 방치된 옛 산업 구조물을 현대에 적합한 모습으로 개조한 사례들을 전 세계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 근거이다. 서울 한강 변에 자리한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국내 주요 전력 공급원으로써 오랜 세월 활발히 구동해오다 이제는 제 기능을 다 하여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화를 앞두고 있다.
1930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 발전소인 당인리 발전소는 반세기 이상 수도권의 전력 보급과 국내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2013년에는 70년대에 이미 폐지된 1, 2호 발전기를 지하로 옮겨 새로 건립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지상에 남아 있는 4, 5호기는 폐기 처분하기로 결정됐으나, 보존 가치가 있는 이 산업 유산을 없애지 않고 문화 공간으로 재정비하자는 의견이 모여 문화공간 조성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 시작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주.한국중부발전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사.한국건축가협회이 주관하는 ‘당인리 문화공간 조성 통합 설계 공모’가 시행됐다. 이를 통해 발전소로써 수명을 다한 화력 4호기와 5호기를 개조하여 새로운 예술의 실험과 대안적 예술의 소비·교육·향유를 위한 복합문화시설을 마련하고자 한다. 산업 유산의 문화적 활용을 위한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설계안을 도출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인접 부지를 대상으로 한국중부발전이 시행 중인 서울 복합 공원의 지하 주차장 건립 사업과 통합해 공모를 진행함으로써 문화 공간의 범위를 확장하고 활용도를 높인다.
서울시 마포구 당인동 1번지 외 68필지로 선정된 대상지는 약 118,779m2 면적으로 상당한 규모이며, 4, 5호기 주변 대지를 아우른다. 도심과 홍대, 문래동 등 예술가 밀집 지역과 인접해 문화 예술 창작소로서의 입지 조건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난 10월 15일 공고를 열어 4일간 총 85팀이 참가 등록을 했으며, 등록자를 대상으로 12월 7일 작품 접수를 마쳤다. 4차에 걸친 현장설명회를 통해 참가자들은 화력발전소를 직접 체험하고 살펴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총 18개 팀이 작품을 제출하여 12월 11일과 13일, 양일간 심사가 진행됐으며, 12월 17일 최종 당선작이 가려졌다.
심사위원회는 배형민서울시립대, 심사위원장, 공순구홍익대, 구자흥한국문화예술회관단체연합회, 서현한양대, 전숙희와이즈건축, 조병수조병수건축연구소, 안상수1차,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이경훈2차, 국민대, 총 건축과 문화예술분야의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설계안의 기본적인 개념도 중요했지만 현장을 얼마나 충실히 분석했는지, 방대한 영역을 얼마나 치밀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중점으로 심사 기준이 적용됐다.
당선은 주.건축사사무소 매스스터디스박기수, 조민석, 강준구의 ‘당인리 포디움과 프롬나드’가 선정됐다. ‘도시·산업·생태×발견·전유·구성·연결·확장’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이와 연계하여 산업길, 생태길, 지름길 등 세 보행길을 축 삼아 공간의 내부 활동을 부지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투영할 수 있는 작품을 제안했다.
심사위원회는 “이 작품은 한강을 볼 수 있는 옥상 공간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였으며, 특히 다양한 외부공간 구성, 대지에 대한 이해, 산업유산을 보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태도가 이번 공모의 목적과 부합되어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우수작은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박도권의 ‘공간을 비우고 시간의 이야기를 채우다’에 돌아갔다. 산업시설의 기능을 다 한 발전소가 예술 영감을 주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주요 시설의 원형을 유지한 채 공간을 비워내는 안을 제시했다. 기존 설비들의 메커니즘에 따라 비워낸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 안은 최대한 원형을 유지한 점과 대상지와 프로그램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제안은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강변 쪽에 배치된 전시장, 공연장 시설 등이 소음, 음향, 동선 측면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예상되며, 지하주차장과 각 공간(공연, 전시, 이벤트 등)의 연계성이 미흡하다는 다소 아쉬운 평이 있었다.
그밖에도 가작에 제이유건축사사무소박제유+원도시건축사사무소허서구+김재경의 ‘당인리 문화발전소’, 건축사사무소 아크바디김성한+종합건축사사무소 스페이스오오기수의 ‘스토크(STOKE)! 더 보일러(THE BOILER)’, 신한종합건축사사무소송주경+무영종합건축사사무소박명협의 ‘프로그레시브 심비오시스(PROGRESSIVE SYMBIOSIS)’가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당선작에는 기본 및 실시설계권이 부여되고, 우수작 1팀은 4천만 원, 가작 3팀에는 각각 2천만 원의 상금이 지급된다. 총 570억 원(문화공간 420억 원, 주차장 150억 원)의 공사비와 총 400억 원의 설계비의 예산으로 진행될 당인리 문화공간은 1월부터 본격 설계에 착수해 2022년에 개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글/이지민 기자, 자료 제공/사.한국건축가협회
당선
당인리 포디움과 프롬나드 _주.건축사사무소 매스스터디스(박기수, 조민석, 강준구)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멈춰진 기계로 이루어진 거대한 감상적 공간이 아니라 미래에 역동적으로 생성될 문화를 담을 총체적 환경으로써 작동하게 하기 위한 생각이다.
1. 서울에는 당인리 부지 규모 이상의 전시, 공연, 기타 행사를 위한 문화 시설이 이미 즐비하다. 그래서 기존 문화시설과의 경쟁이 아닌 차별화된 보완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양한 문화 활동을 서울 이곳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방식으로 담아내기 위해, 외부로부터 무엇을 부가, 발명하기 이전에 기존 내/외부 공간의 물리적 잠재력의 관찰, 발견을 우선한다. 이곳에서 ‘One Liner’ 건축 전략은 불가능하며 또한 불허한다.
2. 거대한 단지에 지속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문화행사 방문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곳은 홍대 지역이라는 풍부한 도시적 조건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서울의 대규모 문화 시설로서는 유일하게 한강 변 입지를 자랑한다.
이로 인한 독특한 생태/경관 조건과 산업/기반시설에 연유한 웅대한 스케일의 거칠지만 순수하고 실용적인 공간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장점이다. 이 매력과 잠재적 수행성을 극대화한다면 문화공간이면서 특정한 목적 없이도 사계절, 밤낮으로 누구나가 즐겨 찾을 수 있는 서울의 대표적 공공 유휴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3. 산업 유산을 재생한 사례 중에는 옛것과 새것의 구분이 어렵게 중화되어 예전의 아우라도, 새로움도 부각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제안은 기존 조건에 최소한의 개입으로 보존되는 부분, 공간/기능상의 요구로 적극적으로 변화되는 부분 간에 명쾌한 시각적, 경험적 구분이 공존하면서 활기를 창출해낼 수 있다. 산업 유산으로서 보존·이용될 5호기와 기계의 공간이 비워지고 문화 활동으로 채워질 4호기의 대조부터, 세부까지 다양한 스케일로 병치될 것이다. 1단계 성공 시 유연하게 추가 진행되어야 하므로 결과 지향이 아닌 진화하는 몽타주 같은 과정 중심의 건축이 또한 현실적이다.
4. 요구된 내부 기능 규모는(8,300m2) 기존 구조물 볼륨 내부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신설 공간은 효과적으로 최소화하고, 기존 공간의 합리적 전유(appropriation) 방식을 우선한다. 요구된 새 용도들 또한 이를 넘어선 사용가능성을 세심히 살펴 전유한다. 기계를 통한 에너지 흐름의 논리로부터 만들어진 공간이 인간/문화의 에너지가 흐르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에는 기계공학자의 단호함과 신경외과의의 정교함이 동시에 필요할 것이다.
5. 변모할 내부 공간의 각 부분은 독립적인 문화 공간으로서 요구된 기능을 수행하며, 나아가 부분 간 연결의 극대화로 다변화할 미래의 문화적 요구를 준비한다. 내부 공간 사이는 물론이고, 건물/단지 주변 다양한 외부 공간과의 전방위적 확장도 중요하다.
화이트 박스(white box)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것이 현대 미술의 과제였고 블랙 박스(black box)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 현대 공연 예술의 도전이었다면, 도시/생태/산업의 풍족한 자원이 있는 이곳은 위와 같은 발견/전유/연결 과정을 통해 미래 최적의 진취적인 문화 생산/향유의 확장적인 터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수
공간을 비우고 시간의 이야기를 채우다 _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박도권)
급격한 발전으로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져가는 서울에서 당인리 화력발전소는 산업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민들에게 다가간다. 홍대에서부터 내려오는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의 흐름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창작문화와 도시민들을 연결하는 문화공원으로서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도시와의 경계를 허물고 시민을 위한 개방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원은 옛 것과 새 것이 결합된 흥미로운 모습을 갖추고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 된다.
발전설비를 철거하여 원형의 흔적을 가진 보이드를 생성한다. 기존의 메커니즘에 따라 유기적으로 구성된 보이드들은 문화발전소의 핵심 공간이 된다.
보일러 공간의 수직보이드는 예술가의 창작 에너지와 영감을 담은 아트보일러로 재점화 된다. 아트보일러를 중심으로 다양한 창작 및 편의시설이 입체적으로 연계된다.
4, 5호기 터빈홀을 통합한 그랜드 터빈홀은 아트보일러에서 발생하는 창작에너지를 확산 시킨다. 융통성과 확장성을 가진 그랜드 터빈홀은 다목적 대안예술공간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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