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건축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네덜란드 출신의 건축가 헨드릭 페트루스 베를라헤Hendrik Petrus Berlage (1856~1934).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 세기 이상 계속되어 온 역사주의와 이에 반발하는 신건축이 격동하는 시기를 거치며, 그를 진정한 모더니스트로 평가받게 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1903)’를 비롯해 ‘헤이그 도시개조안 (1908)’, ‘암스테르담 도시확장 계획안(1915)’ 등의 작품을 남긴 바 있다. 또한, 이 작품의 과정을 함께한 그의 사유는 여러 기고문과 강연을 통해 당시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그가 깊이 있게 다져온 사유 언어들은 20세기로 전환하는 중요한 시기에 건축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젊은 건축가들에게 베를라헤는 건축을 새롭게 정의한 건축가였고, 현실 비평을 통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건축가였으며, 역사적 양식의 모방에서 벗어나 새로운 건축에 이르는 진정한 길을 찾은 건축가였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에게,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처럼 먼 곳에서 오는 희미한 빛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서 들리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물론 그가 남긴 사유와 가치는 그의 이름을 딴 건축 교육기관의 존재와 가르침을 통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새겨지고 있다.
그런 베를라헤의 생각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책이 출간됐다. 그의 강연록과 논문들을 번역한 ‘건축예술과 양식’으로, 김영철, 우영선, 김명식, 3인의 건축 이론가가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3인의 역자는 여러 서양 건축 이론의 원전 중에서도 특히 베를라헤의 저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현대 건축 이론의 첫 고전이자, 그의 사유가 현대의 삶에서 새로운 건축을 위한 창작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책에는 총 여섯 개의 강연록과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1893년 로테르담 건축가협회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협회 기관지에 연재한 ‘건축예술과 인상주의’, 1904년 독일 크레펠트시 박물관협회에서 했던 강연 일부를 정리해 편집한 글 ‘건축예술의 양식에 관한 고찰’, 건축예술 양식에 관한 고찰의 후속편 격으로 전문지에 여러 편으로 나누어 연재됐던 ‘건축예술의 발전 가능성에 관하여’, 1907년 취리히 공예박물관에서의 강연을 확장시킨 ‘건축예술의 근본과 발전’, 1908년 수행한 덴하흐시 마스터플랜에 대한 해제 격인 ‘도시건축에 관하여’, 1928년 근대건축국제회의 창립총회에서 행한 강연 ‘근대건축을 위한 투쟁과 국가의 역할’이다.
하나같이 귀한 글이지만, 특히 ‘건축예술의 양식에 관한 고찰’과 ‘건축예술의 근본과 발전’은 베를라헤가 쓴 가장 유명한 책으로 여겨진다.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도 이 책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역자에 따르면, 건축이 구축의 영역을 넘어, 사유가 선행하고 이를 기술로 실천한다는 믿음을 기록하는 것은 비트루비우스, 알베르티, 팔라디오 등 고대로부터 온 전통이다. 여기에서 건축가 베를라헤는 무엇보다도 기하학의 지식이 있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실제 재료를 다루고 그 구조의 역학을 이해하는 실천적 지혜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건축 실무’에서는 기하학적 질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며, ‘건축의 교육’에서는 인문이 먼저인지, 사실이 먼저인지 하는 사태의 선행도 충분하게 문제 삼지 않는다. 심지어 전자의 지식에 대한 필요성을 질문하지 않거나 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대안은 건축의 사유를 실천하고 훈련하도록 학제화하고, 또 창작의 원리로 작용하도록 이론의 가치를 보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러 다른 문화권에서는 건축고전 문헌을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의 교육 영역에서도 활용되도록 해왔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이 원전의 번역이 건축의 이해보다 오해가 더 많은 오늘의 현실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