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건축을 견인해온 원로 건축가 지순(1935~2021)이 지난 21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1935년 출생한 고인은 195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구조사 건축기술연구소에 입사하며 건축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한국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 건축과로 자리를 옮겨, 표준화된 국민주택을 개발하는 등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탰다. 단독건물 형태의 초기 아파트인 개명아파트와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도 모두 이 시기의 작업들로, 아파트 건축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던 당시, 국내 실정에 맞는 아파트 모델을 제시하는 성과를 거뒀다.
1966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해다.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여 대한민국 1호 여성 건축가가 된 것.
이를 계기로 배우자이자 동료인 건축가 원정수(87)와 함께 1969년 일양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첫 프로젝트인 ‘양지회관(1968)’은 완공과 동시에 여성 건축가가 지은 최초의 건물이라는 타이틀로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여성개발원’, ‘어머니회관’, ‘서울여대 강당’ 등 여성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이끌며 남성 위주였던 한국 건축계에 여성 건축가로서의 저력을 보여줬다. 이 외에도 국내 재벌가의 사택을 비롯해 ‘포항제철 연수원(1969)’, ‘서울대학교 학생회관(1972)’, ‘대한마이크로 부평공장(1973)’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였고, 1976년에는 ‘한국은행 본점 현상설계’에도 당선된 바 있다. 비록 이 작품은 프로젝트 자체가 무효화되는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1987년 12년 만에 착공하여 이들 부부에게 서울시 건축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대표 프로젝트다.
이렇게 일양건축을 이끌던 그와 원정수는 1983년 동료 건축가들(이범재, 김자호, 이광만)과 의기투합해 간삼건축을 설립하고 다시 한번 한국 건축계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 갔다. 간삼건축의 이름으로 선보인 첫 작품인 ‘금성사 평택공장(1983)’을 시작으로 ‘포항공대 마스터플랜(1985)’, ‘동숭아트센터(1989)’ 등 당시로써는 새로운 시도들을 해나가며 현재까지도 중요작으로 언급되는 굵직한 작품들을 완성했다.
그런 그가 생전에 꼽은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포스코 센터(1995)’다. 정보 산업이라는 포스코의 미래 비전에 걸맞은 건물을 만들기 위해 국내 최초로 공조, 조명, 방재, 통신 등이 모두 자동화된 ‘인텔리전트 빌딩 시스템’을 도입한 것. 이러한 포스코 센터는 빌딩자동화·사무자동화·정보통신시스템을 건축물과 유기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한국 현대 건축을 국제적 수준으로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1983년부터 20여 년간 주.간삼건축 대표이사로 재직하며 한국 건축계의 최전선을 누비던 그는 2004년부터 간삼건축의 상임고문으로 직을 옮긴 뒤, 한국여성건축가협회 회장,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및 명예이사, 한국실내건축가협회 고문, 실내장식학회 고문, 대한건축학회 참여이사, 한국주거학회 고문 활동을 병행하며, 최근까지도 원로 건축가로서의 행보를 이어갔다.
장례는 9월 23일, 고인이 명예건축가로 활동한 한국건축가협회 협회장으로 진행됐다.
한국 건축계의 산증인이자 개척자, 여성이라는 편견을 깨고 60여 년 애정으로 우리나라 건축 현장을 지켜온 원로 건축가의 명복을 빈다. 자료제공 / 주.간삼건축, 프로필사진 제공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