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잠잠해도, 바다는 조금씩 올라온다. 모래 한 줌, 방파제 한 단, 골목 끝 배수구 하나가 매일의 경계를 바꾼다. 오래된 어촌의 마을길엔 비릿한 냄새 대신 얕은 염수가 스며들고, 아이들이 놀던 공터는 계절마다 작은 수면이 된다.
낚싯배가 떠나고, 돌아오는 시간표도 바뀌었다. 파도가 높아지고, 너울이 길어지면 그 시간은 곧 위험의 고비다. 어제의 자리가 오늘의 물길이 되는 일은 더 이상 드물지 않다.
높아지는 바다, 낮아지는 마을
해수면은 연평균 3~4mm씩 오르고, 연안의 일부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이 두 곡선이 만나면, 지도 속 선 하나가 후퇴한다. 서해의 갯벌은 바람과 조차에 흔들리고, 동해의 모래해변은 폭풍과 너울에 깎인다. 방조제는 하루를 버티지만, 계절을 보장하진 않는다.
기후의 평균이 변하자, 극한의 빈도도 달라졌다. “한 번” 오던 침수가 “가끔”이 되고, “가끔”은 곧 “자주”가 된다. 낮은 제방은 일시적 안도를 주지만, 물길은 다른 틈을 찾는다.
현장에서 들리는 목소리
“전엔 큰비만 걱정했지, 요샌 바람만 불어도 물이 차오릅니다.” 전남의 한 어민은 선창의 바닥선을 손가락으로 그리며 말했다.
“제방을 또 올리자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우리 집이 먼저 낮아지는 느낌입니다.” 마을 부녀회장은 방수포를 개키며 씁쓸히 웃었다.
연구자는 차트를 펴고 조용히 덧붙인다. “바다는 상승하고, 평균 파고는 증가했고, 지반은 일부 침하합니다. 세 가지가 겹치면, 체감 위험은 배가 됩니다.”
수치로 보는 위험
아래 비교는 주요 연안 거점의 경향을 단순화해 보여준다. 값은 공개된 관측 추세와 지자체 자료를 바탕으로 한 범위다.
지역 | 상대적 해수면 상승(연) | 주요 위험 | 현재 대응 | 취약요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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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안 | 약 3~4mm | 갯벌 침수, 저지대 범람 | 방재문, 펌프장 | 지반 침하, 고밀도 도심 |
부산 영도·가덕 | 약 4mm 내외 | 폭풍해일, 파랑 침식 | 방파제 증고, 경보 | 항만 인프라 노후 |
전남 신안·목포만 | 약 3mm대 | 염전·어장 침수 | 제방 보강, 생태복원 시범 | 고령화, 소득 의존도 |
수치가 작아도, 면적과 시간이 곱해지면 의미가 달라진다. 한 해 몇 밀리미터, 십 년이면 몇 센티미터가 된다. 바닥이 낮은 마을일수록, 그 단위는 생활의 격차가 된다.
벼랑 끝의 생계와 기억
어장은 물의 높이와 온도에 민감하다. 치패의 회유가 어긋나고, 조개 양식의 성장선이 흔들리면, 수익의 달력도 바뀐다. 소금밭은 얕은 범람으로 하루의 작업을 접고, 항구의 얼기설기한 전기선은 염수에 더 자주 고장난다.
무너지는 건 수익만이 아니다. 당산나무 아래 굿당, 파시의 기억, 초등학교 운동장의 굵은 흙냄새 같은 것들이 자꾸 물러난다. 지도에 없는 공동체의 좌표가 희미해진다.
막을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방조제를 더 높이고, 펌프를 더 강하게 돌리는 방식은 즉각적이다. 그러나 물은 다른 길로 돌아온다. 육상 배수로의 역류, 지하수의 염분화, 모래의 대체 침식이 연쇄로 이어진다.
대안은 다층적이어야 한다. 모래의 순환을 회복하는 ‘해변 양빈’, 갯벌과 염습지를 복원해 파랑을 죽이는 ‘자연 기반 해안’, 그리고 고위험 지역의 관리된 이주까지, 선택지는 고통스럽지만 현실적이다.
- 주민 주도 위험지도 작성과 알림체계 구축, 취약가구 맞춤 보강, 소규모 자연기반 해안실험(모래언덕·식생띠), 어업 전환·양식 다변화 지원, 단계적 이주 보상과 빈집 활용 계획
정책은 디테일에서 갈린다
법과 계획은 이미 있다. 연안관리와 침식 대책, 기후위기 적응 전략이 문서로는 충실하다. 빈틈은 속도와 연결성이다. 부처의 사업이 엇갈리고, 예산은 연도별로 쪼개진다. 마을의 묘지가 이전될 때, 도로의 단차는 누가 메우는가. 보험이 되지 않는 손실을, 어느 제도가 인정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말한다. “1cm의 여유고가 수십억의 피해를 줄입니다.” 그러나 여유고는 숫자가 아니라, 현장의 합의로 완성된다. 제방을 높일 때, 어디에 새로운 물길을 낼지, 누가 먼저 물러설지가 더 큰 질문이다.
바다가 묻는 다음 질문
결국 선택은 가치의 문제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건너줄지를 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다시 돌아올 항구를 남길지, 더 안전한 내륙의 학교를 선택할지. 어느 쪽이든, 지금의 지연이 내일의 대가를 키운다.
“우린 여기서 살아왔고, 가능하면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노인의 간단한 문장은 계획의 핵심을 찌른다. 남겨둘 곳과 옮겨갈 곳을 동시에 설계하는 일, 그 이중의 설계가 이제 가장 시급한 과제다.
바다는 서두르지 않지만,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우리의 대응도 느리되, 결코 늦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