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앙리 시리아니로부터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강렬한 경험을 쌓고 귀국해, 20여 년 동안 건축 실무와 교육에 전념한 건축가 정재헌의 글과 작품이 담긴 책이 출간됐다. 이 책에서는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적 어휘가 드러나는 초기 작품부터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근작까지, 그가 오랜 시간 이루어낸 결과를 볼 수 있다.
책은 건축가 로랑 샬로몽의 글 ‘수학적 감성의 구현’으로 시작한다. 로랑 샬로몽은 정재헌의 건축이 철저하게 계획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지만, 보이는 완벽함보단 보이지 않는 감동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정재헌의 ‘집’에서 경험되는 숨겨진 감성은 익숙한 재료와 공간에서 시작되며, 계절 음식처럼 몸에 좋은 삶의 공간으로 완성된다.
김용택의 글 ‘대지와의 조율’ 다음으로 이어지는 저자의 에세이를 읽고 나면, ‘in-side’, 그리고 ‘out-side’가 펼쳐진다. 정재헌의 작품은 대부분 주택이다. 여기에서는 그가 설계한 여러 주택을 소개한다.
건축가에게 가장 평범해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작업은 다름 아닌 ‘집’을 짓는 일이다. 집은 건축의 시작이며, 동시에 그 자체로 완성되는 공간이다. 새로운 건축주를 만날 때마다 건축가는 새로운 집을 상상한다. 대지와 집, 집과 사람의 만남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작품마다 영문 글과 함께 조금은 추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진으로 여정이 시작된다. 계속해서 책을 넘기면 도면, 그리고 약간의 설명이 있는 또 다른 사진 한 장, 그리고 다시 사진, 이렇듯 반복된 여정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여유롭다. 충분한 여백을 두고 자리한 사진들은 천천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 정재헌은 성균관대학교와 파리 벨빌국립건축대학을 졸업했다. 1998년 이엔건축EN architecture을 개소했고, 현재 경희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다. 2005년 ‘제로원디자인센터’로 서울시건축상, 2006년 ‘우리노인병원 및 우리너싱홈’으로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 ‘동백집’으로 경기도건축상, 2011년 ‘오륙도 가원레스토랑’으로 부산다운건축상, 2012년 ‘판교 요철동’으로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에는 두물머리 주택, 동검리 주택단지, 자운당, 양평 펼친집, 이인 디자인 사옥 등이 있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 건축에 대한 생각의 실마리를 발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