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스스로 물건을 만드는 DIY가 유행처럼 돌고 있는 현시대를 미리 예견한 책이 있다.
이 책은 1972년 처음 출간될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를 알리는 새로운 사고방식이자 디자인, 건축 시대를 새롭게 규정하는 정신을 그려내어, 디자인/건축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책에서 소개하는 ‘애드호키즘adhocism’이라는 단어는 1968년 건축비평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라는 의미의 ‘애드호크ad hoc’와 예술운동의 약칭을 나타내는 ‘-이즘ism’의 조합어로, 임시변통, 가용 자원의 활용, 소비자 민주주의, 비주류, 다원주의, 혼종성, 즉흥성, 창의성, 혁신적인 특이한 결합, 규범에서 벗어난 예외, 즉석 대처, 우연적이고 열린 결과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문제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가용 또는 입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사용하거나 기존의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는 일을 말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 타리르 광장에서 나타났던 애드호크적 문화와 공공영역을 사례로 언급하면서 애드호키즘이 사회적 단위에서 갖는 의미, 그리고 정치적 다원주의와 애드호크적 혁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특히 6장에서는 그가 왜 역사적인 혁명들의 전개와 실패의 과정을 언급해야 했는지 그 의미를 현재 시점에서 재확인시킨다. 이 책은 애드호키즘의 영역을 탐구하기 위해 일상의 예술, 과학, 발명, 정치, 도시와 소비시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논제를 살핀다. 300개가 넘는 방대한 도판은 다소 생소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디자이너나 건축가가 일반인의 디자인 관심사를 대변하는 것은 정부가 대신하는 것만큼이나 문제가 있고, 삶의 환경을 조성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누군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라 단언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환경을 돌보는 인간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가로막는 일이라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건축가나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종종 전문가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현장에서 입지가 좁아질 우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전문가의 역할을 스타일이나 형태로서의 디자인을 제시하는 것에서, 개인이 삶의 환경을 탐색하고 조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는 일로 생각하면 건축과 디자인은 더욱 유연하고 다양하게 영역을 확대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