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승효상이 자신의 건축사무소 이로재를 설립한 1989년부터 2015년까지 설계한 작업 중 주요작을 엄선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에서는 그의 건축철학인 ‘빈자의 미학’을 화두로 독자적인 방향을 모색하던 첫 작업 수졸당(1992)부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석복을 위한 성서적 풍경 명례성지(2015)까지, 사반세기 동안 승효상이 건축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만나볼 수 있다.
프랑스의 도시학자 프랑수아 아셰는 ‘메타폴리스’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며 현실적 삶에 기반을 둔 다중적이고 복합적이며 독립적인 공간으로 구성된 현대적 도시공동체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승효상은 메타폴리스를 ‘성찰적 도시’로 번역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찰이란 땅의 논리와 생리를 무시하고 단순한 수치로만 판단하여 땅의 윤리를 훼손했던 인간들의 행적에 대한 것이다. 그는 사람이 각기 다른 지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땅에도 고유한 무늬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자연의 세월이 만든 무늬이며, 우리의 삶이 새겨진 무늬다. 지문을 바탕에 둔 그의 작업들은 생성과 변화, 연대, 환경 등을 중요한 키워드로 삼는다.
개인 주택에서부터 오피스, 숙박시설, 문화공간, 교육시설, 종교시설,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성격을 지닌 작업에는 그가 지키고자 했던 중요한 건축개념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승효상의 작업은 주어진 땅에 고유한 풍경으로 자리하며 오랫동안 그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그것이 복잡한 도시 속이든 깊은 산 속이든 말이다.
2000년 작 웰콤시티는 도시 속에 자리한 오피스 건물로, 거대한 덩어리가 기존 풍경을 가로막거나 거스르지 않도록 작은 단위로 나눴다. 내부공간을 활용해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서 마을을 지향하며 공유하는 건축을 선보인 것이다. 자연 속에 있는 건물도 마찬가지다. 기존 지형과 나무의 훼손을 최소화하고 오브제로서 풍경을 그리는데 더욱 중점을 두었다. 이처럼 승효상의 작업은 거주자와 자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작품집이 아닌 ‘건축 도큐먼트’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그의 작품 활동을 훑어보며 건축에 대한 그만의 철학을 발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