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 건축,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
서양건축과 차이를 통해 한국건축의 정체성에 접근하다
전작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를 통해 한국 건축의 현실을 비판하고 전통의 이론화에 대해 화두를 던졌던 건축학자 이상헌. 그가 이번에는 ‘한국 건축의 정체성’에 대해 작정하고 말문을 열었다. 한국 전통 건축에는 많은 지혜가 담겨있지만, 그것이 언어화되거나 문법으로 체계화되지 않았다. 언어화되지 않았던 한국 전통 건축의 원리를 현대에 소통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 건축을 지배하는 서양 건축의 언어와 개념을 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한국 건축과 서양 건축의 패러다임의 차이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이 차이는 전통 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공간을 열어 준다. 즉, 서양 건축과 한국 건축의 차이를 통해 전통 건축이 담고 있는 원리와 지혜를 현대 건축에서 쉽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이상헌이 주장하는 ‘전통의 현대적 번역’이다.
그는 이렇게 잠재되어 있지만 언어화되지 않은 한국 건축의 고유한 원리를 현대에 소통 가능한 언어로 설명하고 이론화함으로써 한국건축의 정체성을 밝히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한국 건축의 정체성>은 건축의 개념, 건축물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 경험 주체의 위치, 공간에 대한 개념, 안과 밖의 인식 체계, 경계에 대한 인식, 공간의 분화 과정에서 개체와 전체의 관계, 건축과 자연의 관계, 건축을 통한 상징의 표현이라는 아홉 개의 범주에서 다양한 소주제를 통해 한국 건축과 서양 건축의 차이들을 서술한다.
첫 장 ‘건축의 개념’에서 서양 건축은 미적 지각의 대상이지만 한국 건축은 득도(得道)의 도구이며, 왜 한국에서 건축이 독립적 학문으로 발전하지 않았는지 설명한다. ‘인식과 경험’에서 서양 건축은 주로 시각에 의존하지만, 한국 건축은 몸의 감각을 통해 경험한다는 것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예컨대 종묘의 월대나 경복궁의 바닥에 거친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은 돌을 다듬을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거친 돌바닥을 걸으면서 몸가짐을 조심할 수밖에 없고, 제례를 서두르지 않으며 신중히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한옥의 기단이나 마루의 높이, 담과 문, 벽의 위치와 높이도 모두 몸의 움직임에 대응하도록 고려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한국 건축은 가히 몸의 건축이라 할 만하다.
‘인간의 위상’에서 한국 건축은 경험 주체의 위치가 서양건축과 달리 건물의 안과 밖, 여러 곳에 동시에 있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건축에서 파사드의 부재와 틀어진 배치를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공간의 개념’에서 한국 건축의 공간은 삼차원에 갇힌 볼륨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발생적인 시공간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설명한다. 마당과 칸을 이용한 공간 구축원리는 한국건축의 이러한 공간 개념을 잘 반영한다.
‘안과 밖’, ‘경계’에 대한 인식도 한국 건축과 서양 건축이 매우 다르다. 한국 건축은 서양 건축과 달리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문간, 마당, 처마, 방, 대청은 모두 모호한 경계를 갖는 공간이다. 이러한 경계의 모호함은 공간의 중첩과 상호 관입으로 나타나서 한국 건축은 안인 듯하면서 밖이 되고, 밖이면서도 안이 되는 공간이 많다. 안과 밖이 서로 관입 되기 때문에 내외부 공간의 켜들이 중첩되면서 입체적 조망을 형성하는데 이것은 서양 건축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한국 건축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밖에 ‘건축과 자연’에선 자연에 대한 인식, 건축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건축물의 배치와 정원조성 방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상징과 소통’에서는 건축물이 기념성을 표상하고 사회와 소통하는 방식에서 한국 건축이 서양건축과 어떻게 다른지를 기념비와 배경, 약한 건축 등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저자 이상헌이 이렇게 다양한 범주에서 한국 건축과 서양 건축을 비교해 가며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전승되는 한국 건축의 전통을 자의식적으로 이론화하는, 즉 ‘전통의 이론화’이다. 즉 잠재하는 것의 구체화로, 전통 건축에 대한 주관적 감상이나 비평이 아니라 언어화되지 않은 전통 건축의 지혜와 원리에 관해 해석이다.
그는 우리의 자연과 풍토와 역사에서 자란 한국 건축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경험할 수 있도록 서양 건축의 개념에 가려진 감각을 깨워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건축의 장점과 지혜를 현대적으로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건축가들에게 유용하게 이용될 거라 기대된다. 서양 건축과의 차이로 드러나는 한국 건축의 정체성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할지에 대한 좌표를 설정해 주고, 개별 프로젝트에서 건축가들의 상상력을 통한 창조적 디자인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헌은 책의 후기에서 이러한 노력이 ‘한국의 건축학’을 정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가 땅을 다루고 집을 앉히는, 자연이나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재료와 집을 사용하는 예(禮)를 정립함으로써 건축의 도(道)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 유교에서 도의 행위 규범이 예로 나타나듯이, 건축의 예를 학문화하면 우리의 건축학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 그는 서양 건축의 인식 틀을 벗어나서 다른 (전통적) 방식으로 건축을 생각하려는 자의식적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미 교육을 통해 우리의 의식이 서양 건축의 지배적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상헌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